랜선 로맨스가 만든 스위스의 북새통, 그리고 프로 여행러의 생존템

랜선 로맨스가 만든 스위스의 북새통, 그리고 프로 여행러의 생존템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 내 안의 역마살도 덩달아 최고조에 달한다. 30개국 이상을 제집 드나들듯 누벼온 여행광이자 커머스 에디터로서의 직업병이 발동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길을 떠날 때마다 여정의 피로도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똑똑한 아이템에 눈독을 들이는 건 이제 거의 본능에 가깝다. 마침 얼리 아마존 프라임 데이 세일이 막을 올렸으니, 내 깐깐한 레이더망을 가동해 겉만 번지르르한 가짜 할인 속에서 진짜배기들을 골라낼 때가 왔다.

사람들을 이토록 부지런히 짐 싸게 만드는 원동력을 지켜보는 건 꽤 흥미롭다. 때로는 잘 만들어진 드라마 한 편이 그 어떤 여행 가이드북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니까. 방영된 지 6년이 훌쩍 넘은 K-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무대, 스위스 이젤트발트가 딱 그런 경우다. 최근 워싱턴포스트 보도를 보며 묘한 미소가 지어졌는데, 극 중 북한 장교 리정혁이 형을 그리워하며 피아노를 치던 그 자그마한 호숫가 부두가 아직도 전 세계 팬들의 성지로 통하고 있다는 거다. 남한의 재벌 딸 윤세리가 우연히 그 연주를 듣던 낭만적인 장면을 직접 재현해 보겠다고 여행길에 오르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물론 그 낭만의 실체는 지독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작년 가을 이곳을 찾은 미국인 라우스 부부는 그깟 나무 부두에 발을 들이기 위해 무려 두 시간을 대기해야만 했다. 주변에 있던 한국, 일본 팬들과 수다를 떨며 버틴 끝에 기어이 드라마 OST까지 틀어놓고 달콤한 인증샷을 건졌다니 그 열정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현지 관광청 매니저 티티아 바일란트의 말마따나 원래는 동네 사람들도 거들떠보지 않던 낡은 부두였건만, 이제는 부두에 선 사람들을 구경하러 오는 인파가 따로 생길 정도라니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인구 400명 남짓한 알프스 산자락의 조용한 시골 마을에 하루 천 명씩 밀려드는 풍경을 상상해 보라. 원래 하이킹이나 보트를 즐기던 소수의 여행객만 찾던 마을은 팬데믹 이후 여행 빗장이 풀리면서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됐다. 넘쳐나는 관광버스와 인파로 동네가 마비되자, 당국은 버스 출입을 2시간당 2대로 제한하고 인터라켄을 오가는 급행 노선에 120인승 2층 버스까지 투입하며 진화에 나섰다. 급기야 작년에는 그 핫플레이스 부두 앞에 개찰구를 세워두고 5프랑(약 9천 원)씩 입장료까지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이 한 해에 대략 30만 7천 달러 규모인데, 화장실 청소비나 쓰레기 처리 같은 동네 유지 보수 비용으로 알뜰하게 쓰이고 있다. 다만 돈 내기 아까운 사람들은 부두 옆에서 꼼수로 사진만 찍고 가는 통에, 밀려드는 인파에 비하면 수익 자체가 엄청난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이런 우당탕탕 섞인 전 세계의 관광지 한복판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철 체력만큼이나 튼튼한 장비가 필수다. 내가 이번 프라임 데이를 샅샅이 뒤져 블랙 프라이데이 뺨치는 역대급 가격의 여행용 캐리어를 찾아낸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다. 사람에 치이고 버스에 구겨 타는 여정을 견뎌낼 진짜배기가 필요했으니까.

아마존에서 별점 5점 만점을 준 리뷰만 2만 4천 개가 넘는 이 3종 세트(20, 24, 28인치)는 정말 물건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내구성 하나만큼은 입을 모아 찬양하는데, 한 후기가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다가 기내용 캐리어가 맨 아래층까지 무지막지하게 굴러떨어지는 아찔한 사고를 겪었는데, 놀랍게도 가방이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는 간증이다. 당사자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지만 돈값 하나는 제대로 한 셈이다. 옵션에 색상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지만, 가장 쏠쏠하게 할인을 챙기려면 네이비 색상을 노리는 것이 요령이다. 세상은 넓고 북적이는 명소는 끊임없이 생겨난다. 일단 튼튼한 가방부터 하나 장만해 두고 다음 행선지를 느긋하게 고민해 보는 건 어떨까.

장수진 (Jang Su-jin)